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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작가 한강이 쓴 ‘세한도’ 찬문을 보고 싶다

화제 작가 한강이 쓴 ‘세한도’ 찬문을 보고 싶다

📂 사회
사회 관련 이미지 - 세한도는
사회 관련 이미지 - 세한도는

수정2025-10-28 19:16등록2025-10-28 19:16

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element.0:00이광이 잡념잡상 _21문우서림 대표 김영복 (하)세한도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 같은 것입니다. 15m에서 끝날 것이 아니지요. 박물관은 감옥보다 더한 곳이에요. 한번 들어가면 작품 면회가 5~10년 걸립니다. 세한도는 상설 공간을 마련해서, 이 시대의 찬문이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합니다.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비록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원치 않을 것이다. 어찌 중간에 뜻을 바꾸는 일이 있겠는가.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물며 자식을 염두에 두겠는가. 많은 말 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 강산만 돌려주면 그만이다.”광고이규채(1890~1947), 만주 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다. 1924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이시영을 만난 이후 김구 여운형 윤기섭 조완구 등과 교유하며 망명했다. 1932년 독립군 참모장으로 ‘쌍성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는 한중 연합군이 일본 만주 연합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둔 항일투쟁사의 주요 전투 중 하나다. 당시 손에 총상을 입었다. 1934년 상하이에서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 경성지법 재판에서 일본인 판사가 “형이 면장이고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귀화하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우리 강산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첫머리 인용은 이 회유에 대한 응수다. 판사는 징역 10년을 때렸다.2019년 한국방송(KBS) ‘티브이(TV)쇼 진품명품’에 기록물이 하나 나왔다. 한지도 공책도 아닌, 1940년 경기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김수명 상점’의 계산서 용지 묶음이다. 총 32매, 좌로 편철되어 있다. 갱지는 양면에, 습자지는 한면에 기록이 있다. 이규채는 출소하여 모친 시묘살이를 치른 직후, 그간 독립운동 여정을 연보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책 ‘이규채 기억록’ 해제 박경목).광고광고“정말 세세하고 시기가 정확한, 놀라운 기록입니다. 독립운동 기록들이 더러 있지만 청산리나 봉오동, 어느 전투도 일지 형식의 기록은 없습니다. ‘백범일지’보다 더 상세해요. 사선을 넘는 순간순간을 보면 눈물겨운 대목들이 많습니다. 또 계산서 용지가 말을 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얼마를 책정해야 할까요?”‘진품명품’ 감정위원이자 서울 인사동 터줏대감 김영복은 고민했다. 감정가는 인사동 시세를 기준으로 잡는데 전례가 없고, 이 기록에 값을 매기는 일이 가당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광판 숫자는 끝없이 올라가다가 ‘0’으로 나왔다. 무등산의 ‘무등’(無等)이 더없이 높아 비교 불가할 때 쓰는 말이고, 0원의 ‘무가’(無價)도 더없이 높아 값을 매길 수 없을 때 쓰는 말이니, 그 뜻을 담았다. ‘이규채 자술연보’는 의뢰인인 증손 이상옥씨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에 기증했다.광고1990년대 인사동은 성시를 이뤘다. 들어온 물건이 나가는데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 ‘문우서림’을 차려 독립한 김영복은 어느덧 잔뼈가 굵고, 눈이 밝아 이 바닥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가전략’을 구사했다. 대개 팔 사람은 고서를 들고 인사동을 한바퀴 돈다. 얼마를 부르는가, 여기저기 간을 보는 것이다. 다른 집의 호가를 짐작한 그는 통상 매입가보다 1할쯤 얹어 불렀다. 그러면 소문이 나고, 좋은 물건이 이 집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횡재한 적은 없으시냐고 물었다.“오래전에 화첩을 하나 샀어요. 1830년 무렵 조선 사신들이 중국 연행 간 그림첩인데, 연행도가 아주 귀합니다. 당시 행렬과 복식, 뱃길과 지형 등을 세세하게 묘사했고, 매수가 많아요. 근데 낙관도 없고, 화가 이름도 없어. 진품일 확률은 높게 안 봤어요. 옛 모습을 연구, 복원할 때 이런 연행도가 기초가 되거든요. 혹 모사품이라 하더라도 사료적 가치를 보고 산 거지요. 당시 3500만원을 줬어요.”사 놓고 기다리는 것이 이 일이다. 2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임자를 만났다. 작자는 불분명하지만 그림은 진품이었다. 5억원에 팔았다. 기다림과 기회 비용이 있으니 액면대로 남긴 것은 아니나 틀림없는 횡재였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고, 욕심에 눈멀어 왕창 날린 날도 있다. 이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여러해 전 한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추사 ‘세한도’에 값을 매기면 어느 정도나 되겠냐고 묻는다. 이 천하의 걸작, 국보에 값을 따지라니 난감한 일이다. 1844년 추사(완당) 59살, 제주 유배 5년이 되었을 때 제자에게 그려 준 이 그림.광고“추사 제주 유배 시절,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중국을 드나들며 어렵게 구한 책을 스승에게 보냅니다. 한번은 120권, 또 8권, 10권, 수시로 보내줍니다. 다 모으면 소달구지 한가득일게요. 연경에서 한양으로 또 제주로, 사람이 이고 지고 만리도 넘을 길을 걸어서, 귀양살이하는 스승에게…”추사는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주며 긴 화제를 달았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곤경 이전의 그대는 찬할 것이 없겠지만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곤경 전후가 세한 전후의 송백처럼 여일(如一)하다. 글은 이어진다. ‘…고생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으니….’세한도는 이상적을 따라 청으로 간다. 그곳 학자 16인이 격찬하면서 제찬(題贊)을 쓰고, 글이 그림 옆에 붙는다. 이후 제자 김병선-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아들 민규식-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1944년 도일)-서화 수집가 손재형(귀국)-사채업자 이근태-고미술 소장가 손세기, 그리고 아들 손창근이 보관해 오던 중 1974년 국보로 지정되고(‘완당평전’), 2020년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오늘에 이른다.“손재형이 두달을 매일 아침 문안 인사드리고, 그에 감복한 후지쓰카가 세한도를 그냥 내주는 대목은 어떤 정신을 보여줍니다. 해방 공간에서 손재형은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 세사람에게서 찬문을 받지요. 그림과 글이 이어져 세한도는 쫙 펴면 15m에 이릅니다. 저는 부통령 이시영의 글을 백미로 꼽습니다.”‘…산천도 문득 변하고 물건도 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때 지조를 지키면서 세한도를 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내가 이 그림을 보니, 문득 수십년 동안의 고심과 금화(金火)의 여러 선열이 생각나서 옷소매로 눈물을 닦게 된다. 추사가 뜻이 있다면 그의 감정에 앞서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이시영 찬문 부분)“금화가 어렵습니다. 오행에서 금(金)은 가을, 화(火)는 여름인데 계절이 뒤바뀐 거지요. 가을은 숙살지기(肅殺之氣), 엄숙해지고 살 떨리는 기운입니다. 독립운동의 시간을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금화는 동지들의 주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 세한도는 100년 동안 한·중·일을 넘나들며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금화의 세월을 살아온 선열들의 넋은 다 어디로 가셨는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게 된다, 그런 말입니다.”그림 옆 글들은 다 고절(孤節)을 찬하고 있지만 딱 하나, 이시영은 다르다. 변치 않는 송백의 지조, 그 탄복할 만한 기쁨을 찬하기에 앞서, 함께 귀국하지 못한 동지들 앞에 슬픔의 예를 올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끝 문장, ‘그의 감정에 앞서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추사의 감정은 기쁨이겠으되, 나의 감정은 통한이라 말하는 것이라고 김영복은 해석했다.그에게 상(商)은 운명 같은 것, 값을 매겨야 상이다. 당시에 50억원을 책정했다. 지금은 100억원도 훌쩍 넘을 것이고, 이미 값을 초월한 ‘무가지보’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했다.“세한도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 같은 것입니다. 15m에서 끝날 것이 아니지요. 박물관은 감옥보다 더한 곳이에요. 한번 들어가면 작품 면회가 5~10년 걸립니다. 세한도는 상설 공간을 마련해서, 이 시대의 찬문이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합니다.”이제는 소감의 글이 한글로 붙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과거와 현재는 박물관에서 조우하는 것이니, 혹여 작가 한강의 찬문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새 관장 유홍준 선생이 지혜로운 분이니 어떤 방도를 찾지 않겠느냐고, 그는 꿈꾸었다.인사동은 내리막길이라, 그 많던 고서점이 통문관과 문우서림 두집 남았다. 나이도 들고, 먹고사는 일에 덜 시달리게 되었을 때, 집에 딱 한점 걸어두고 싶을 때, 많이 찾는 것이 추사 간찰이나 대원군 난초라 한다. 소품 한점에 500만~1천만원 정도. 수요가 많으니 위작도 많아 조심해야 한다. 김영복은 2005년 ‘진품명품’ 감정위원으로 위촉돼 20년째 일하고 있다. 책 ‘옛것에 혹하다’(돌베개)를 썼다.이광이|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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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21문우서림 대표 김영복 (하)

세한도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물 같은 것입니다. 15m에서 끝날 것이 아니지요. 박물관은 감옥보다 더한 곳이에요. 한번 들어가면 작품 면회가 5~10년 걸립니다. 세한도는 상설 공간을 마련해서, 이 시대의 찬문이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비록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원치 않을 것이다. 어찌 중간에 뜻을 바꾸는 일이 있겠는가. 나에게 노모가 계시는데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물며 자식을 염두에 두겠는가. 많은 말 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 강산만 돌려주면 그만이다.”

이규채(1890~1947), 만주 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다. 1924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이시영을 만난 이후 김구 여운형 윤기섭 조완구 등과 교유하며 망명했다. 1932년 독립군 참모장으로 ‘쌍성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는 한중 연합군이 일본 만주 연합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둔 항일투쟁사의 주요 전투 중 하나다. 당시 손에 총상을 입었다. 1934년 상하이에서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다. 경성지법 재판에서 일본인 판사가 “형이 면장이고 자녀가 셋이나 있는데 귀화하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한다. ‘우리 강산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첫머리 인용은 이 회유에 대한 응수다. 판사는 징역 10년을 때렸다.

2019년 한국방송(KBS) ‘티브이(TV)쇼 진품명품’에 기록물이 하나 나왔다. 한지도 공책도 아닌, 1940년 경기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김수명 상점’의 계산서 용지 묶음이다. 총 32매, 좌로 편철되어 있다. 갱지는 양면에, 습자지는 한면에 기록이 있다. 이규채는 출소하여 모친 시묘살이를 치른 직후, 그간 독립운동 여정을 연보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책 ‘이규채 기억록’ 해제 박경목).

“정말 세세하고 시기가 정확한, 놀라운 기록입니다. 독립운동 기록들이 더러 있지만 청산리나 봉오동, 어느 전투도 일지 형식의 기록은 없습니다. ‘백범일지’보다 더 상세해요. 사선을 넘는 순간순간을 보면 눈물겨운 대목들이 많습니다. 또 계산서 용지가 말을 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얼마를 책정해야 할까요?”

‘진품명품’ 감정위원이자 서울 인사동 터줏대감 김영복은 고민했다. 감정가는 인사동 시세를 기준으로 잡는데 전례가 없고, 이 기록에 값을 매기는 일이 가당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광판 숫자는 끝없이 올라가다가 ‘0’으로 나왔다. 무등산의 ‘무등’(無等)이 더없이 높아 비교 불가할 때 쓰는 말이고, 0원의 ‘무가’(無價)도 더없이 높아 값을 매길 수 없을 때 쓰는 말이니, 그 뜻을 담았다. ‘이규채 자술연보’는 의뢰인인 증손 이상옥씨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에 기증했다.

1990년대 인사동은 성시를 이뤘다. 들어온 물건이 나가는데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 ‘문우서림’을 차려 독립한 김영복은 어느덧 잔뼈가 굵고, 눈이 밝아 이 바닥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가전략’을 구사했다. 대개 팔 사람은 고서를 들고 인사동을 한바퀴 돈다. 얼마를 부르는가, 여기저기 간을 보는 것이다. 다른 집의 호가를 짐작한 그는 통상 매입가보다 1할쯤 얹어 불렀다. 그러면 소문이 나고, 좋은 물건이 이 집으로 몰리게 마련이다. 횡재한 적은 없으시냐고 물었다.

“오래전에 화첩을 하나 샀어요. 1830년 무렵 조선 사신들이 중국 연행 간 그림첩인데, 연행도가 아주 귀합니다. 당시 행렬과 복식, 뱃길과 지형 등을 세세하게 묘사했고, 매수가 많아요. 근데 낙관도 없고, 화가 이름도 없어. 진품일 확률은 높게 안 봤어요. 옛 모습을 연구, 복원할 때 이런 연행도가 기초가 되거든요. 혹 모사품이라 하더라도 사료적 가치를 보고 산 거지요. 당시 3500만원을 줬어요.”

사 놓고 기다리는 것이 이 일이다. 20여년이 흐른 어느 날 임자를 만났다. 작자는 불분명하지만 그림은 진품이었다. 5억원에 팔았다. 기다림과 기회 비용이 있으니 액면대로 남긴 것은 아니나 틀림없는 횡재였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고, 욕심에 눈멀어 왕창 날린 날도 있다. 이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여러해 전 한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추사 ‘세한도’에 값을 매기면 어느 정도나 되겠냐고 묻는다. 이 천하의 걸작, 국보에 값을 따지라니 난감한 일이다. 1844년 추사(완당) 59살, 제주 유배 5년이 되었을 때 제자에게 그려 준 이 그림.

“추사 제주 유배 시절,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중국을 드나들며 어렵게 구한 책을 스승에게 보냅니다. 한번은 120권, 또 8권, 10권, 수시로 보내줍니다. 다 모으면 소달구지 한가득일게요. 연경에서 한양으로 또 제주로, 사람이 이고 지고 만리도 넘을 길을 걸어서, 귀양살이하는 스승에게…”

추사는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주며 긴 화제를 달았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 주지도 않았다. 곤경 이전의 그대는 찬할 것이 없겠지만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곤경 전후가 세한 전후의 송백처럼 여일(如一)하다. 글은 이어진다. ‘…고생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으니….’

세한도는 이상적을 따라 청으로 간다. 그곳 학자 16인이 격찬하면서 제찬(題贊)을 쓰고, 글이 그림 옆에 붙는다. 이후 제자 김병선-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아들 민규식-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1944년 도일)-서화 수집가 손재형(귀국)-사채업자 이근태-고미술 소장가 손세기, 그리고 아들 손창근이 보관해 오던 중 1974년 국보로 지정되고(‘완당평전’), 2020년 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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