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지나 사랑을 지키는 일 [.txt]
수정2026-03-07 07:00등록2026-03-07 07:00
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element.0:00작정하고 연애시 l 진은영 ‘사랑은’또 하나의 사랑이 떠나는 것은또 하나의 나를 두고 오는 일그 모든 ‘나들’을 내거는 다음의 사랑은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기형도문학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하는 시인 기형도의 시 ‘빈집’이 보인다. 광명시광고광고지난해 가을, 기형도문학관에서 진행된 시 창작 수업을 위해 매주 광명을 오고 갔다. 한번은 차를 몰고 가지 않은 꽤 긴 여정이었다. 버스에서 잘못 내려 가야 할 곳까지 최단 경로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낯이 익었다. 차로 지나면서 봤던 곳이어서? 꿈에 나왔던 곳과 비슷해서? 알고 보니 십몇년 전에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밤을 새웠던 곳이었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게 다 소용이 있는 일인지 마음을 셈하며 나머지만 가지고 돌아왔던 날의 딱 한번의 풍경. 이렇게 다시 오게 되다니. 우연이 데려다 놓은 곳에서 나는 남겨져 있던 나를 데리고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너와는 헤어졌지만 너를 기다렸던 나와 재회한 일로 이상하게 씁쓸하고도 웃음이 났다.광고광고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진은영 시인의 산문에서 읽고는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사랑에 몰두하는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겠지만 무수한 사랑을 빠져나오고 보면, 결국에 나는 맛도 모양도 아직 알 길이 없는 빵 반죽을 빚고 있다. 뜨거워야만 부풀어 오르고, 그제야 모양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랑을 아직도 반죽인 상태로 가지고 있다니. 어쩌면 나의 오븐에는 발효가 부족해 부풀다 만 사랑이나 재료를 빼먹어 영영 맛을 간직할 수 없는 밀가루 덩어리만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여전히 예열하는 사람, 불을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문예지에 실린 시를 읽으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읽게 되는 시가 있다. 그 시가 위대해서라기보다, 그 시가 최단 경로로 도달하려는 운동화 끈을 마음대로 풀어놓거나 혹은 비포장도로처럼 매끄럽지 않아서다. 나를 한번 멈춰 세우고는 읽어보라 말한다. 읽으면서 대답하라고 한다. 대답하면서 물어보라고 한다. 한두장의 시가 내 인생 전체를 멈춰 세우고는 그래서 사랑이 무엇이었느냐 묻는다. 나는 그날부로 대답을 고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하고 있는 영혼의 모습이기도 하다.사랑을 받을수록 내겐 여백이 많아진다. 어떤 사랑도 품어볼 수 있을 것같이 희고 드넓은 사랑이었지만, 나를 떠나가면 내가 사랑 앞에서 느꼈던 나의 윤곽만큼의 절취선에 도려진다. 나만 남는 것. 사랑은 결국 나를 두고 오는 일이다. “내가 베이면서 내가 벨 수 있는” 그 시간에 내가 떠나오는 사랑도, 나를 떠나간 사랑도 모두 나를 남겨둔다. 그것은 “정원사 없는 정원”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일이다가, 나의 정원에 침입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일.아무 때나 열린 “고장 난 문”으로 바라보았던 광명 어느 동네 풍경은 이제 텅 빈 것 같다. 그날 밤새워 기다리던 나를 수거하고 돌아왔기 때문일까. 그 사랑은 진즉 끝났는데, 너는 여태 왜 기다리고 있었니? 물으면 나는 이제 내 사랑을 지키려고,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다음 ‘천한 번째’ 질문을 내게 건넬 것만 같다.광고마치 헤어지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별을 맞이했던 어느 날.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호텔식 수건 개키기’ 유튜브를 보며 접어두었던 흰 수건 한장이 욕실 서랍장에 들어 있을 때. 나는 그제야 눈물이 났다. 새 수건을 개켜 그것을 맨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꺼내 쓰지 않을 참이었다. 동남아 어느 리조트처럼 침대 위에 백조 모양으로 접어둘까? 웃음을 참으며 이것만 다 개키고 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장면까지도 생각났다. 그 장면까지는 모두 뽀송뽀송한데 나는 마를 새 없이 늘 축축한 얼굴을 하고선 마른 수건을 찾고 있었다. “물 위에 우리가 끝없이 쓸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가끔 주방 싱크대에 걸쳐 널어둔 부직포 행주 같은 것을 보며 사랑을 떠올린다. 깨끗한 순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지만, 물기를 훔치고는 최선을 다해 비틀었다가 다시 말라가는 시간을 반복하는 것. 너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만, 사랑 그 자체가 끝나지 않는 반복. 사랑에 대한 비유가 뜨거운 불을 기다리던 빵 반죽에서 싱크대에 걸린 물기 어린 행주로 뒤바뀌는 것은 “깊은 손바닥” 뒤집기와도 같은 일.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사랑은, 하고 말해보았다. 그 뒤에 무슨 말을 하게 될지 궁금해서. 이런 정의는 사랑이 다 끝난 뒤에 할 것만 같지만 어쩌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할 수 있는 말 같았다.다음 사랑은 이전까지 해온 모든 사랑을 내거는 일이니까.여기는 다시 숲이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할수록 너와 멀어지고, 길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할수록 너와 가까워지는 미로. 사랑을 통해 내가 선명해질수록 절취선의 깊이는 깊어져만 간다. 나를 떼어내도 좋아. 욕실 은빛 서랍장 귀퉁이에 붙여 놓은 접착력 좋은 야광 스티커가 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살아나고, 형광등이 켜지면 감춰지는 일을 한다.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었다.서윤후 시인서윤후 시인l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을 수상했다.이제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을 들을 차례. 작가들이 숨어 애송하는 연애시의 내막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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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연애시 l 진은영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랑이 떠나는 것은
또 하나의 나를 두고 오는 일
그 모든 ‘나들’을 내거는 다음의 사랑은
경기도 광명시에 위치한 기형도문학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하는 시인 기형도의 시 ‘빈집’이 보인다. 광명시
지난해 가을, 기형도문학관에서 진행된 시 창작 수업을 위해 매주 광명을 오고 갔다. 한번은 차를 몰고 가지 않은 꽤 긴 여정이었다. 버스에서 잘못 내려 가야 할 곳까지 최단 경로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낯이 익었다. 차로 지나면서 봤던 곳이어서? 꿈에 나왔던 곳과 비슷해서? 알고 보니 십몇년 전에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밤을 새웠던 곳이었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게 다 소용이 있는 일인지 마음을 셈하며 나머지만 가지고 돌아왔던 날의 딱 한번의 풍경. 이렇게 다시 오게 되다니. 우연이 데려다 놓은 곳에서 나는 남겨져 있던 나를 데리고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너와는 헤어졌지만 너를 기다렸던 나와 재회한 일로 이상하게 씁쓸하고도 웃음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진은영 시인의 산문에서 읽고는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사랑에 몰두하는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겠지만 무수한 사랑을 빠져나오고 보면, 결국에 나는 맛도 모양도 아직 알 길이 없는 빵 반죽을 빚고 있다. 뜨거워야만 부풀어 오르고, 그제야 모양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랑을 아직도 반죽인 상태로 가지고 있다니. 어쩌면 나의 오븐에는 발효가 부족해 부풀다 만 사랑이나 재료를 빼먹어 영영 맛을 간직할 수 없는 밀가루 덩어리만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여전히 예열하는 사람, 불을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문예지에 실린 시를 읽으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읽게 되는 시가 있다. 그 시가 위대해서라기보다, 그 시가 최단 경로로 도달하려는 운동화 끈을 마음대로 풀어놓거나 혹은 비포장도로처럼 매끄럽지 않아서다. 나를 한번 멈춰 세우고는 읽어보라 말한다. 읽으면서 대답하라고 한다. 대답하면서 물어보라고 한다. 한두장의 시가 내 인생 전체를 멈춰 세우고는 그래서 사랑이 무엇이었느냐 묻는다. 나는 그날부로 대답을 고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하고 있는 영혼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랑을 받을수록 내겐 여백이 많아진다. 어떤 사랑도 품어볼 수 있을 것같이 희고 드넓은 사랑이었지만, 나를 떠나가면 내가 사랑 앞에서 느꼈던 나의 윤곽만큼의 절취선에 도려진다. 나만 남는 것. 사랑은 결국 나를 두고 오는 일이다. “내가 베이면서 내가 벨 수 있는” 그 시간에 내가 떠나오는 사랑도, 나를 떠나간 사랑도 모두 나를 남겨둔다. 그것은 “정원사 없는 정원”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일이다가, 나의 정원에 침입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일.
아무 때나 열린 “고장 난 문”으로 바라보았던 광명 어느 동네 풍경은 이제 텅 빈 것 같다. 그날 밤새워 기다리던 나를 수거하고 돌아왔기 때문일까. 그 사랑은 진즉 끝났는데, 너는 여태 왜 기다리고 있었니? 물으면 나는 이제 내 사랑을 지키려고,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다음 ‘천한 번째’ 질문을 내게 건넬 것만 같다.
마치 헤어지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별을 맞이했던 어느 날.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호텔식 수건 개키기’ 유튜브를 보며 접어두었던 흰 수건 한장이 욕실 서랍장에 들어 있을 때. 나는 그제야 눈물이 났다. 새 수건을 개켜 그것을 맨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꺼내 쓰지 않을 참이었다. 동남아 어느 리조트처럼 침대 위에 백조 모양으로 접어둘까? 웃음을 참으며 이것만 다 개키고 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장면까지도 생각났다. 그 장면까지는 모두 뽀송뽀송한데 나는 마를 새 없이 늘 축축한 얼굴을 하고선 마른 수건을 찾고 있었다. “물 위에 우리가 끝없이 쓸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가끔 주방 싱크대에 걸쳐 널어둔 부직포 행주 같은 것을 보며 사랑을 떠올린다. 깨끗한 순간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지만, 물기를 훔치고는 최선을 다해 비틀었다가 다시 말라가는 시간을 반복하는 것. 너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만, 사랑 그 자체가 끝나지 않는 반복. 사랑에 대한 비유가 뜨거운 불을 기다리던 빵 반죽에서 싱크대에 걸린 물기 어린 행주로 뒤바뀌는 것은 “깊은 손바닥” 뒤집기와도 같은 일.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사랑은, 하고 말해보았다. 그 뒤에 무슨 말을 하게 될지 궁금해서. 이런 정의는 사랑이 다 끝난 뒤에 할 것만 같지만 어쩌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할 수 있는 말 같았다.
다음 사랑은 이전까지 해온 모든 사랑을 내거는 일이니까.
여기는 다시 숲이다.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할수록 너와 멀어지고, 길을 잃어도 좋다고 생각할수록 너와 가까워지는 미로. 사랑을 통해 내가 선명해질수록 절취선의 깊이는 깊어져만 간다. 나를 떼어내도 좋아. 욕실 은빛 서랍장 귀퉁이에 붙여 놓은 접착력 좋은 야광 스티커가 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살아나고, 형광등이 켜지면 감춰지는 일을 한다.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었다.
서윤후 시인l 2009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제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을 들을 차례. 작가들이 숨어 애송하는 연애시의 내막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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