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귀도 어둡던 뒷방 늙은이가 ‘엿듣기’ 마녀가 되어 [.txt]
수정2026-01-23 05:02등록2026-01-23 05:02
기사를 읽어드립니다Your browser does not support theaudioelement.0:00귀나팔 l 리어노라 캐링턴 지음, 이지원 옮김, 워크룸프레스(2022)광고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영국에서 멕시코로 이주해 살고 있는 아흔두살 여성 메리언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아들네에서 ‘뒷방 늙은이’로 살아간다. 어느 날 이웃 친구 카르멜라가 ‘은과 자개로 상감하고, 물소의 뿔처럼 웅장한 곡선을 그리는 특출나게 예쁜’ 귀나팔을 선물하면서 어두웠던 메리언의 귀가 트인다. 귀나팔을 선물하며 카르멜라는 말했다. “일흔살과 일곱살 사이의 인간은 고양이가 아닌 이상 믿어서는 안 돼. 지나치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 그리고 사람들이 네가 귀가 먹었다고 여기고서 말하는 걸 엿들을 때 그 짜릿한 권력을 상상해 봐.” 귀나팔은 빛과 소리 모두 어두침침한 가장자리에서 중심의 소리를 끌어와 권력관계를 뒤집을 수도 있는 은근히 통쾌한 전복의 도구가 된다.그러나 귀나팔을 통해 메리언이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끔찍하다. 아들네 가족은 메리언을 도시 남쪽 끝 변두리에 있는 시설에 보낼 생각이다. 그곳은 아주 늙은 여자들만 받고 탑과 버섯과 이글루와 장화처럼 이상한 모양의 건물로 이루어진 곳이다. 운영자 갬비트 박사 부부는 절제를 강조하며 부실한 식사나 제공하고 허구한 날 따분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토록 낯선 곳에서 메리언은 식당 한가운데 걸린 수녀의 초상화에 매혹당한다. 그림을 볼 때마다 수녀가 자신을 향해 윙크를 하는 것이다.광고감옥이나 다름없는 요양원 수용자들과 좌충우돌 관계를 맺어가던 중 메리언은 흑인 여성 크리스타벨 번스에게서 책을 한권 선물 받는데, 그 책에는 초상화의 주인공 수녀 도냐 로살린다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도냐 로살린다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사실 극악한 이단의 마녀였다. 늙고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마녀 취급을 받는 요양원 노파들에게 도냐 로살린다의 초상화는 어쩌면 거울과도 같은 효과를 지닌다.‘귀나팔’은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소설가인 리어노라 캐링턴이 서른세살에 완성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연인 막스 에른스트가 군 수용소에 억류되자 정신착란을 겪고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을 전전하다 멕시코로 이주했던 캐링턴에게 작품 속에서나마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초현실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최후의 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광고광고귀나팔과 함께 능력치가 상승한 메리언은 요양원 안의 범죄와 비리를 해결하고 지진과 함께 도래한 ‘악마’ 혹은 ‘마녀’들과 조우한다.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러나 현실과 치밀하게 얽혀 있다. 작가는 어떤 초현실도 결국 현실로부터, 거울 속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경험으로 체득한 사람이므로.한때 장래 희망으로 ‘귀여운 할머니’를 선호하는 흐름이 있었다. 소설 속 메리언은 귀나팔을 가지기 전에도 귀여운 할머니로 분류될 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귀나팔을 선물 받은 뒤 메리언은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엿들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밑에서 지워진 채 살아가는 악마와 마녀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마녀가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파멸 중인 세계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노인이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전복적인 여성 노인 캐릭터는 없었다. 한마디로 메리언은 귀여운 할머니이자 투쟁하는 할머니다. 투쟁해서 귀여운 할머니다.광고이주혜 소설가∙번역가이주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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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나팔 l 리어노라 캐링턴 지음, 이지원 옮김, 워크룸프레스(2022)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영국에서 멕시코로 이주해 살고 있는 아흔두살 여성 메리언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아들네에서 ‘뒷방 늙은이’로 살아간다. 어느 날 이웃 친구 카르멜라가 ‘은과 자개로 상감하고, 물소의 뿔처럼 웅장한 곡선을 그리는 특출나게 예쁜’ 귀나팔을 선물하면서 어두웠던 메리언의 귀가 트인다. 귀나팔을 선물하며 카르멜라는 말했다. “일흔살과 일곱살 사이의 인간은 고양이가 아닌 이상 믿어서는 안 돼. 지나치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 그리고 사람들이 네가 귀가 먹었다고 여기고서 말하는 걸 엿들을 때 그 짜릿한 권력을 상상해 봐.” 귀나팔은 빛과 소리 모두 어두침침한 가장자리에서 중심의 소리를 끌어와 권력관계를 뒤집을 수도 있는 은근히 통쾌한 전복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귀나팔을 통해 메리언이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끔찍하다. 아들네 가족은 메리언을 도시 남쪽 끝 변두리에 있는 시설에 보낼 생각이다. 그곳은 아주 늙은 여자들만 받고 탑과 버섯과 이글루와 장화처럼 이상한 모양의 건물로 이루어진 곳이다. 운영자 갬비트 박사 부부는 절제를 강조하며 부실한 식사나 제공하고 허구한 날 따분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이토록 낯선 곳에서 메리언은 식당 한가운데 걸린 수녀의 초상화에 매혹당한다. 그림을 볼 때마다 수녀가 자신을 향해 윙크를 하는 것이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요양원 수용자들과 좌충우돌 관계를 맺어가던 중 메리언은 흑인 여성 크리스타벨 번스에게서 책을 한권 선물 받는데, 그 책에는 초상화의 주인공 수녀 도냐 로살린다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도냐 로살린다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사실 극악한 이단의 마녀였다. 늙고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마녀 취급을 받는 요양원 노파들에게 도냐 로살린다의 초상화는 어쩌면 거울과도 같은 효과를 지닌다.
‘귀나팔’은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소설가인 리어노라 캐링턴이 서른세살에 완성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연인 막스 에른스트가 군 수용소에 억류되자 정신착란을 겪고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을 전전하다 멕시코로 이주했던 캐링턴에게 작품 속에서나마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초현실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최후의 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귀나팔과 함께 능력치가 상승한 메리언은 요양원 안의 범죄와 비리를 해결하고 지진과 함께 도래한 ‘악마’ 혹은 ‘마녀’들과 조우한다.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전개는 그러나 현실과 치밀하게 얽혀 있다. 작가는 어떤 초현실도 결국 현실로부터, 거울 속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경험으로 체득한 사람이므로.
한때 장래 희망으로 ‘귀여운 할머니’를 선호하는 흐름이 있었다. 소설 속 메리언은 귀나팔을 가지기 전에도 귀여운 할머니로 분류될 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귀나팔을 선물 받은 뒤 메리언은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엿들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밑에서 지워진 채 살아가는 악마와 마녀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마녀가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파멸 중인 세계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노인이라니, 이보다 더 매력적이고 전복적인 여성 노인 캐릭터는 없었다. 한마디로 메리언은 귀여운 할머니이자 투쟁하는 할머니다. 투쟁해서 귀여운 할머니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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